한눈에 볼 수 있는 조선 왕 계보와 인물평 요약 정리

역사와 고전

한눈에 볼 수 있는 조선 왕 계보와 인물평 요약 정리

월리만세 2021. 9. 5.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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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이끌었던 국왕들의 재위 기간 및 당시 핵심인물에 대한 짧은 요약을 했습니다. 조선왕조를 전체적으로 조망하시는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왕에 대한 짧은 인물평을 겻들여 정리를 했는데, 해당 왕조를 대한 이해를 하는데 필요할 것 같아 추가하였습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을 참고하였습니다. 

 

 

1. 태조 : 1335~1406, 재위 1392~1398

 

조선 제1대 왕으로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성계입니다.

 

함경도 영흥 출생으로 고조부 이안사가 이곳에서 원라나에 투항하고 별슬을 한 이래로 이 지역의 세력가로 지냈습니다. 원라나 세력이 약해지자 아버지 이자춘은 고려에 충성을 맹세하고 공을 세워 고려의 벼슬을 받았습니다. 

 

이성계도 여러 전장에서 공을 세워 고려의 영웅이 되었고 정도전과 의기투합을 하게 됩니다. 

 

당시 라이벌이었던 최영 장군의 요동정벌 계획에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고 위화도에서 회군을 합니다. 최영을 몰아내고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세우고 개혁을 진행합니다. 

 

이때 정몽주가 반격을 가하자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임으로써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개국을 하게 됩니다.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친명사대, 숭유억불을 국가이념으로 삼고, 새로운 왕조를 위협하는 과거의 세력들을 모두 몰살시킵니다. 

 

불행하게도 세자책봉에 실패하여 1차, 2차 왕자의 난을 거쳐 결국 이방원(태종)이 왕권을 이어받게 됩니다. 

 

이성계는 태종이 자신의 옛 동료와 형제들까지 해치면서 왕이 된 태종에게 화가 나 소요산, 금강산을 떠돌다가 반란을 일으켜 보았지만 실패한 이후 한양으로 돌아와 조용히 지내다가 74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태조의 능은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입니다. 

 

조선은 한반도 함경도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토착세력에 의해 건국되었던 것 같습니다. 태조는 무인 출신이었고,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아 새로운 국가를 세웠지만, 말년에 임금 자리를 놓고 싸우는 자식들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을 것 같습니다. 당시에 74세까지 살았다면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2. 정종 : 1357~1419, 재위 1398~1400

 

조선 제2대 왕으로 이름은 방과입니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동생 방원에 의해 세자가 되어 태조에게 양위를 받아 왕이 되었습니다. 2차 왕자의 난으로 동생 방원에게 선위를 하고 2년 만에 왕위에서 내려옵니다. 

 

정조의 능은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후릉입니다. 

 

불운의 왕입니다. 형제들 싸움에 휘말려 동생에 의해 왕이 된 인물입니다. 더구나 2년뒤에 다시 동생에게 왕위를 넘겼는데, 오히려 권력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바로 넘긴 것이 본인 인생으로서는 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3. 태종 : 1367~1422, 재위 1400~1418

 

조선 제3대 왕으로 이름은 방원입니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성균관에서 수학을 하고 명나라에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정몽주를 살해하여 이성계가 왕권을 잡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태조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남은 등 세력을 제거했습니다. 이때 둘째 형 방과에게 왕위를 양보했는데, 이 분이 조선 2대왕 정종입니다. 

 

2년 뒤 2차 왕자의 난으로 넷째 형 방간을 제거하고 태종이 왕위에 오릅니다. 

 

태종의 업적은 중앙집권 확립입니다. 의정부를 설치하고 6조를 만들어 행정을 재편했으며 사병을 없애고 군정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지방군을 정비하고 수군을 늘렸으며, 병선을 만드는데 힘썼습니다. 전국 토지를 정비하고 공신전에도 세금을 부과했고, 호패법을 실시했습니다. 

 

조선이라는 국가의 기틀을 잡는데 주력을 했던 왕입니다.

 

세자 책봉에서 양년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2개월 만에 상왕으로 물러납니다. 하지만, 병권을 장악한 채 세공을 지켜줍니다. 

 

1422년 56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왕능은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입니다. 

 

세자 책봉에 불만을 갖고 본인 스스로 형들과 아버지의 신하들을 모두 죽이고 왕이 된 인물입니다. 손에 피를 묻히고 왕이 되었지만, 국가에 대한 기틀은 제대로 잡는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무엇보다 태종이 훌륭했던 것은 세종을 세자로 책봉하고 일찌감치 물러나 길을 터 준 것입니다. 

 

 

4. 세종 : 1397~1450, 재위 1418~1450

 

조선 제4대 왕으로 이름은 도, 외자입니다. 태종의 넷째 아들로 세자 책봉을 받고 2개월 만에 즉위를 합니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해 학자를 양성하고, 유교에 의한 정치, 문화를 확립하였습니다. 즉위 초부터 인쇄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경자자, 갑인자, 병진자 등을 만들어 내 간행사업을 뒷받침했고, 훈민정음을 창제했고, 이에 대한 연구와 해설서까지 편찬을 했습니다. 

 

화포를 개량해 중국을 모방하던 수준을 벗어났고, 정인지, 장영실에 의해 해시계와 물시계가 만들어졌습니다. 또, 칠정산내외편, 제가역상집 등 편찬을 통해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 역법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측우기를 발명했고, 농법 보급을 위해 농사직설을 편찬했고, 의약 분야에서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를 편찬했습니다. 

 

법전을 정비하여 속육전을 편찬했고, 국토개척을 위해 두만강과 압록강 방면에 6진과 4군을 설치하고 백성을 이주시켰습니다. 불교는 개국초 정책에 따라 억압을 유지했으나, 말년에는 불교에 호의적으로 대하였습니다. 

 

세종은 본인 자체의 역량이 뛰어나다기 보다는 인재를 찾아내어 키우는 능력이 뛰어난 왕이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세종의 능은 경기도 여주군에 있는 영릉입니다.  

 

대왕이란 호칭을 붙여서 어색하지 않은 유일한 왕입니다. 일부 외교 부분에 있어서 약했다는 평가가 있지만, 업적이 많아서 단점은 잘 드러나지 않는 편입니다. 최고의 업적은 훈민정음이 아닌가 합니다. K팝과 K드라마가 글로벌화가 된 것은 세종대왕의 공이 아닐까요? 한글이 없었다면, BTS가 중국어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지도... 

 

5. 문종 : 1414~1452, 재위 1450~1452

 

조선 제5대 왕으로 이름은 향, 외자로 되어 있습니다. 세종의 첫째 아들입니다. 

 

신중하고 차분하며 끈기가 있었던 성품으로 세종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받았습니다. 30년간 세종의 업무를 도우며 실무능력도 출중했습니다. 역대 조선왕 중에 가장 준비된 임금이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학문의 수준도 높았고, 문장도 훌륭했다고 합니다. 효성이 지극하고, 측우기를 고안했고 화차를 설계했다고 합니다. 왕위에 오른 후 본인이 설계한 화차를 변경에 배치했고, 국방에 관심이 높았다고 합니다. 

 

다만, 몸이 허약해 즉위를 하고 불과 2년 4개월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나이는 38세였습니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현릉입니다.  

 

세종을 아버지로 두었으니 얼마나 잘 배웠을지 상상이 갑니다. 이 분이 통치를 했다면 조선의 운명이 또 달라졌을지 모르겠습니다. 평생 세자로 지내다가 왕이 된 지 불과 2년 만에 세상을 떠나다니 안타깝습니다. 

 

6. 단종 : 1441~1457, 재위 1452~1455

 

조선 제6대 왕으로 이름은 홍위 입니다. 12세에 즉위를 하였지만, 4년간 임금 수업을 받았고, 세종에게 총명하다는 평가를 받은 임금이었습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자신을 지켜주던 김종서, 황보인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여 섭정을 맡겼지만, 임금으로서의 역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결국, 수양대군이 측근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붙여 압박을 해 왕위를 넘겼습니다. 

 

단종은 박팽년, 성삼문 등이 복위를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유배를 갔고, 다시 금성대군이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다시 서인으로 강등되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능은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장릉입니다. 

 

실록을 읽어보면 훌륭한 임금이 될 조짐이 있었는데, 16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2세 왕이 된 후 4년간 얼마나 두려움과 고민이 많았을까요? 어린나이에 경험하지 못할 고통을 겪다가 세상을 떠난 임금이 아닌가 합니다.

 

 

7. 세조 : 1417~1468, 재위 1455~1468

 

조선 제7대 왕으로 이름은 수지입니다. 세종의 둘째 아들이고, 문종의 동생입니다. 

 

유교경전과 역사서뿐 아니라 역법, 병서에 통달했고, 풍수지리 전문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음악이론과 악기 연주에도 능했고, 활은 강궁을 사용할 만큼 힘이 좋았습니다. 

 

직설적이고 속을 감추지 못하는 성격으로 세종과 문종 시절에 권력의 야심을 드러냈으나 문종이 많이 감싸주었습니다. 단종이 즉위 하자 다음 해에 바로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합니다.

 

세조는 강력한 왕권 구축을 추진했습니다.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집현전과 경연도 폐지하는 등 유교정치를 부정하면서까지 절대권력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신하들과 학생들에게는 끊임없이 공부를 권하고, 자신의 생활은 물론 국가살림에 낭비가 없도록 검소했습니다. 국정운영에 자신만의 소신과 철학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경국대전을 편찬했고, 호패법을 부활시켰습니다. 역사서인 동국통감, 국조보감을 편찬했고, 동국지도를 제작했습니다. 백성들에게 불편했던 부민고소금지법을 폐지했고, 지방 수령의 비리를 수시로 감찰했습니다. 

 

외교는 중국에는 사대를 야인에 대해서는 강온양면책을 사용하는 현실주의 노선을 취했습니다. 공신을 비호했는데, 즉위하고 세 차례나 공신을 책봉해 대토지를 소유한 공신들 때문에 관리들에게 줄 과전이 바닥나 직전법을 실시했습니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에 있는 광릉입니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이된 인물이지만 권력욕이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왕권을 극도로 올려두고 폭정을 했다면 안 좋은 이미지였겠지만, 세조는 나름대로 자신만의 국정철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13년간 재위를 했는데, 많은 사람을 죽이고 왕이 된 것 치고는 오래 임금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8. 예종 : 1450~1469, 재위 1468~1469

 

조선 제8대 왕으로 이름은 황, 외자입니다. 세조의 둘째 아들이고, 부인은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입니다. 조용한 성품과 경청하는 자세, 신중한 판단으로 세조와 대신들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즉위를 하고 1년 2개월만에 어렸을 때부터 앓았던 족질(발에 생기는 병)로 요절했습니다.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세종의 능을 이장했고, 농민들에게 둔전 경작을 허가했습니다. 

 

세조가 심혈을 기울였던 경국대전 편찬에 관심을 쏟았으나 완성을 못했습니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창릉입니다. 

 

최고의 권력을 손에 넣은 지 겨우 1년 조금 더 누리다가 세상을 떠나다니, 인생이 무상합니다. 나름 좋은 정치를 해보려던 것 같은데 안타깝습니다. 세조 때 등장한 한명회의 권세가 눈에 보이네요. 

 

9. 성종 : 1457~1494, 재위 1469~1494

 

조선 제9대 왕으로 이름은 혈, 외자입니다. 세조의 손자이고, 부인은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입니다.

 

예종이 죽은 뒤 한명회, 신숙주 등 대신들이 왕위에 올렸으며 당시 나이가 13세였습니다. 정희왕후가 6년간 수렴청정을 했습니다. 

 

친정을 시작하고, 세력가인 한명회의 기세를 꺾고, 김종직을 중심으로 사림파를 등용해 훈구세력을 견제했습니다. 유교원리에 충실한 도학 군주로 경연을 중시했고, 신하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성조시대는 조선왕조 중 최고의 태평성대로 평가됩니다. 생산력의 발전으로 국가는 부유했고, 유교는 사회 곳곳에 파고들었습니다. 최고의 성과는 경국대전의 완성입니다. 이는 유교국가의 구상이 제도적으로 완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반면, 과학기술 분야가 정체되었고, 군사분야는 약화되었습니다. 학문중심의 정치가 원인이었는데, 잦은 외침에도 내부 반란은 없었습니다. 

 

성종의 능은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릉입니다.  

 

 

조선 중기에 접어들어 태평성대가 되었다는데, 성종 때부터인 듯합니다. 비록 과학기술과 국방은 약해졌지만, 백성들은 평화롭게 지냈을 것 같습니다. 여전히 한명회의 힘이 느껴지네요. 자주 지나다니던 선릉역이 바로 성종의 모였다니 신기하네요.

 

10. 연산군 : 1476~1506, 재위 1494~1506

 

조선 제10대 왕으로 이름은 융, 외자입니다. 성종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폐비 윤 씨입니다. 어릴 때는 조용했고 별다른 행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얼굴에 종기가 떨어지지 않았고, 입안이 헐거나 눈병 등 잔병치레가 많았다고 합니다.

 

성종과 달리 강력한 군주를 꿈꾸었고, 당시 조정을 장악한 대간들을 무오사화를 통해 단숨에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폐비 윤 씨 사건을 명분으로 갑자사화를 통해 성종의 후궁, 대신, 대간을 모두 제거하면서 폭정을 시작했습니다. 

 

연산군의 폭정의 모토는 "위를 능멸하는 자를 벌한다"였는데 독재에 가까운 왕권강화를 이루었습니다. 

 

사간원 폐지, 사헌부 축소, 홍문관 폐지, 성균관 활동 중단 및 군간 관계의 명확한 구분 등 제도적으로 독재를 막을 수 없도록 조치를 했습니다. 

 

폭압으로 만든 왕권강화는 백성이 아니라 본인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했는데, 사냥, 연회, 기생차출, 사대부 여인 희롱, 대신들의 재산 몰수, 궁궐 주면 민가 철거, 농지의 사냥터화 등 역사상 가장 심한 권리를 휘둘렀습니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폐출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묘는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습니다.   

 

이런 왕을 모시고 어떻게 조선이 망하지 않았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연산군도 불쌍하지 겨우 12년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다니, 이 사람도 죽을 때 인생무상을 느꼈을 듯합니다. 이 당시 사관들이 대단합니다. 이런 폭정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다니,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11. 중종 : 1488~1544, 재위 1506~1544

 

조선 제11대 왕으로 이름은 역, 외자입니다. 성종의 둘째 아들이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변덕스러운 폭군 밑에서 살았으니 이복동생이더라도 언제 죽을지 몰라 신경쇠약에 걸렸을 듯 합니다. 

 

더구나, 왕이 된 배경이 신하들이 일으킨 반정 때문이었으니, 근본적으로 왕권이 약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중종은 힘 있는 신하에게 힘을 몰아주고, 그에게 의지하는 전략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 신하가 힘이 너무 강해지면 죽이고, 또 다른 세력을 강화시켜 그에게 의지했습니다. 태생적으로 본인 힘으로 구축한 왕권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쩌면 나름대로 최선이었을 수 있습니다. 

 

덕분에, 급진적이긴 하나 이상정치를 꿈꾸었던 조광조와 같은 인물도 사화를 통해 제거하는 실수를 했지만, 중종 입장에서는 본인이 살길을 도모한 것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종 본인은 검소하고, 대신의 말에도 경청을 했으나, 신하들의 사치를 막지 못해 백성은 가난해졌고, 본인도 주관이 없어 각 분야에 뚜렷한 성과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능은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정릉입니다. 

 

중종은 한마디로 불쌍한 인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긴 연산군 같은 무서운 왕 밑에서 떨면서 지내다가 신하들 덕분으로 왕이 되었으니 평생 본인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내 보았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본인 권좌유지에만 힘쓸 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왕이었습니다. 한심해 보이지만, 어쩔 수 없었을 듯합니다.

 

12. 인종 : 1515~1545, 재위 1544~1545

 

조선 제12대 왕으로 이름은 천윤입니다. 중종의 첫째 아들입니다.  인종은 장성한 아들이 있는 계모인 문정왕후 때문에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세자가 먹다 남긴 음식을 먹은 아랫사람들이 식중독에 걸리고, 동궁전에 불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인종은 문정왕후에게 효심을 다했고, 나이 어린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을 우애로 대했습니다. 

 

그런데, 중종이 죽은 뒤 5개월간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아 병이 들었고, 이후 병세가 악화되었는데도 약을 거부해 결국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효릉입니다. 

 

인품이 착한 효자였나 봅니다. 어렵게 어린 시절을 견디고 왕위를 차지했는데, 자신 있게 본인 색깔을 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상처가 컸을지 모르지만,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다니 슬픈인생입니다. 

 

 

13. 명종 : 1534~1567, 재위 1545~1567

 

조선 제13대 왕으로 이름은 환, 외자입니다. 중종의 둘째 아들입니다. 인종의 이복동생입니다.  어머니는 문정왕후입니다.

 

인종이 8개월만에 죽고,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어머니 문정왕후가 8년간 수렴청정을 했습니다. 어릴 때 권력투쟁에 시달렸는지 문정왕후가 정사를 볼 때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왕이 된 이후 왕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했지만, 22년간 대신들의 권력을 꺽지 못하고 끌려다녔습니다. 결국 자신만의 정치는 한 번도 해 보지 못하고, 34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능은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강릉입니다. 

 

어린 시절에 굴곡이 있었던 왕들은 자기 정치를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것 같습니다. 명종도 슬픈 왕들 중 한 명입니다. 22년간 자기 힘 한번 못써보고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임금이라고 해서 모두 부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14. 선조 : 1552~1608, 재위 : 1567~1608

 

조선 제14대 왕으로 이름은 균, 외자입니다. 나중에 공으로 개명했습니다.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입니다. 명종이 후사 없이 죽고, 16세에 임금이 되었습니다. 

 

임금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임금이 되어, 믿고 의지할 정치세력도 없었으나 정국이 서인과 동인,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 대립하기 시작하자 이를 이용해 서서히 왕권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선조 본인은 파벌들을 이용한 붕당정치를 통해 왕권을 확보했지만, 쓸데없는 당쟁으로 국력은 약화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정찰을 갔던 통신사들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다른 보고를 하여 침략에 대비할 기회를 잃었으니까요.

 

임진왜란이 나자 보름 만에 피난을 떠나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 했던 선조는 머리 회전이 빨랐고, 현실적인 판단을 잘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주장에 한 발짝 빼놓고, 잘못되면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기도 하고, 왕위를 내려놓겠다고 거짓 선위로 신하들을 여러 차례 당황시켰습니다. 

 

7년 전쟁이 끝나고 선종은 자신을 호위하고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한 이들의 공이 훨씬 크다고 주장했고, 조선땅을 지키기 위해 일어났던 수많은 일선 장수와 백성들의 공을 홀대했습니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목릉입니다. 

 

선조는 평생 본인의 안위만을 생각한 왕입니다. 전란 중의 대처도 그렇고, 이렇다 할 업적도 없습니다. 덕분에 이순신 장군의 행적이 더 빛나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이 작은 땅에 충무공과 같은 세계적인 명장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15. 광해군 : 1575~1641, 재위 1608~1623

 

조선 제15대 왕으로 이름은 혼, 외자입니다. 선조의 둘째 아들입니다. 선조는 원래 신성군을 총애했는데, 임진왜란으로 도망치는 중 평양에서 급하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광해군은 선조를 대신해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의 민심을 수습하고, 군사를 모았습니다. 정유재란 때도 전라도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 조달의 책무를 다했습니다. 

 

즉위 후 공납제의 폐단을 조정하기 위해 대동법을 실시했고, 호패법과 양전을 실시했습니다. 전후 불타버린 서적들의 재간행에 힘썼고, 실리적이고 자주적인 외교를 추구했습니다. 

 

후금과 명나라의 사이에서 명의 파병 요구에 강홍립 장군에게 1만의 병사를 명에 보내지만, 후금에 투항하도록 지시해 후금의 침략을 방어했습니다. 일본과도 외교를 복원해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인을 데려왔습니다. 

 

다만, 창덕궁 재건공사 후 경덕궁, 인경궁 등을 보수하느라 민생이 피폐해지기도 했습니다. 능양군을 추종하는 세력이 반정으로 폐위되어 유배되었습니다. 묘호는 광해군지묘로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습니다. 

 

영화 '광해'가 떠오릅니다. 광해군은 사대주의 외교가 아닌 중립외교로 명분이 아닌 실리를 취했던 왕입니다. 일본과 외교를 회복해 포로를 송환받은 것도 같은 맥락인 듯합니다. 확실히 기존 조선왕들과 다른 콘셉트입니다. 정말 영화 '광해'처럼 다른 인물이 왕의 역할을 했던 것일까요?

 

 

16. 인조 : 1595~1649, 재위 1623~1649

 

조선 제16대 왕으로 이름은 종, 외자입니다. 선조의 손자로 광해군이 반정으로 유배를 가면서 신하들에 의해 옹립된 왕입니다. 때문에 반정에 공을 세운 서인과 남인의 사림들을 중용했습니다. 

 

인조는 광해군의 현실주의 외교를 비판하고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합니다. 때문에 후금으로부터 공격을 당해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국호를 청으로 바꾼 후금이 요구한 군신관계를 거부했다가 병자호란을 맞습니다. 

 

결국, 남한산성에서 삼전도의 비극을 당하게 됩니다. 삼전도는 머리를 땅에 크게 찧으며 절하는 것으로 당시 유교숭상주의 사대부 지식인들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인조는 두 차례 전란을 수습하고자 수어청을 만들고 어영청과 훈련도감의 인력을 늘려 조선 후기 5 군영 체제를 정비합니다. 강원도에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시범적으로 유통시킵니다. 

 

능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장릉입니다.

 

친명배금 정책을 취하자마자 두 차례 전쟁을 겪습니다. 나라에 힘이 없다면, 광해군처럼 중립외교를 했으면 어떨까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친미, 친중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취하고 있습니다. 나라에 힘(국방력)이 있다면 자주외교를 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나라에 힘이 없을 때 외교를 잘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인조가 보여주었습니다.

 

17. 효종 : 1619~1659, 재위 1649~1659

 

조선 제17대 왕으로 이름은 정연입니다. 인조의 둘째 아들로 병자호란으로 형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으로 잡혀가 볼모 생활을 했습니다.

 

귀국한 후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게 되자 31세에 왕위를 이어받게 됩니다. 

 

효종은 현실주의자로 군사 부문에 힘을 쏟았습니다. 여영청을 대대적으로 강화했고, 강화 연안에 보루와 진을 설치하고 남한산성에 충분한 양곡을 비축합니다. 지방군인 속오군의 훈련을 강화하고, 네덜란드 표류자 하멜로 하여금 조총 제작과 개량에 힘을 기울입니다. 틈나는 대로 군사훈련과 군기 확립을 위해 시간을 사용했습니다. 

 

전쟁 후 경제회복을 위해 전라도에 대동법을 시행했고, 상평통보를 유통했습니다. 말년에 송시열, 송준길에게 전권을 맡겼고, 41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에 있는 영릉입니다. 

 

전란 후 나라를 수습한 임금인데 의외로 주목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전쟁에 패해 볼모로 외국에 끌려갔었으니 당연히 국방에 힘을 많이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나라의 자주국방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 많습니다. 

 

18. 현종 : 1641~1674, 재위 1659~1674

 

조선 제18대 왕으로 이름은 연, 외자입니다. 효종의 첫째 아들입니다. 효종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을 때 중국 신관에서 태어났습니다. 

 

현종은 병약하여 재위 15년간 내내 침과 뜸에 의존했지만, 병으로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국사력 강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군대의 규모를 키우고, 무재 시연을 관람했으며, 군사훈련 강도를 높였습니다. 

 

재정확보를 위해 호남에 대동법과 양전을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강화도 정족산성에 새로 사고를 만들어 역대 실록을 보관하도록 하고, 혼천의를 만들어 천문관측 연구에 이바지했습니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숭릉입니다. 

 

전쟁에 패하여 외국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니, 자연스럽게 국방력에 힘을 썼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새로 사고를 만들어 실록을 보관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저는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자세한 역사기록물이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소실되지 않고, 현대에 전해진 것이 정말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19. 숙종 : 1661~1720, 재위 1674~1720

 

조선 제19대 왕으로 이름은 순, 외자입니다. 현종의 외아들입니다. 숙종시대는 사극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암투로 유명합니다. 

 

그만큼 당시에는 궁중 암투와 공작정치가 난무했다고 합니다.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파벌 당쟁도 심했을 때니까요. 그래서 그랬는지 정치성과는 크게 없었습니다. 

 

군역의 개혁도 사대부의 간섭으로 흐지부지되고, 지방 수령들의 부정부패 척결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다만, 청나라와 협상해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문제를 정리했고, 일본 막부와 협상하여 울릉도에 왜인 출입을 금지해 울릉도 귀속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숙종에 대한 인물평은 극과 극으로 갈리며, 아무런 원칙 없이 결과를 쉽게 뒤집었다고 합니다. 정치적 사안이나 사람, 세력을 지나치게 흑과 백으로 가르길 좋아했고, 다시 뒤집는데 거리낌이 없었다고 합니다. 

 

능은 경기도 고양군에 있는 명릉입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임금들이 당파싸움에 휘말려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큰 성과가 없는 왕이었는데, 전반적인 평가가 좋지 않았던 것을 보아 본인 권력유지를 위해 원칙 없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20. 경종 : 1688~1724, 재위 1720~1724

 

조선 제20대 왕으로 이름은 윤, 외자입니다.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입니다. 3살 때 세자가 되었고, 14세에 생모가 독약을 받고 죽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노론의 견제를 받으며 불안과 긴장 속에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때문에 즉위 후에도 무기력했습니다. 말도 별로 없고 말도 더듬었다고 하니, 이후에도 당파 세력들에 의해 힘든 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건강도 좋지 않아 병약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국사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재위 기간 내내 노론과 소론의 싸움에 휘둘려 정치에 무관심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능은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의릉입니다. 

 

 재위 기간을 보니 4년입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독약을 받고 죽는 것을 경험하고, 끊임없이 정치세력의 견제를 받으며 세자 시절을 보냈으니, 여간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이 아니면 제대로 왕권을 확보하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힘이 약한 왕과 당파싸움만 일삼았던 정치판의 사례입니다. 

 

21. 영조 : 1694~1776, 재위 1724~1776

 

조선 제21대 왕으로 이름은 금, 외자입니다. 아버지는 숙종입니다. 

 

영조는 탕평책을 펼쳐 노론과 소론의 균형을 맞추면서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온건파를 고르게 등용하여 정국을 안정시켰으나 당쟁이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탕평의 성과는 높이 평가됩니다. 

 

영조는 무수리의 자식이라는 정통성 문제로 콤플렉스가 있었고, 사도세자의 비극이나 대리 청정도 모두 콤플렉스를 벗어나기 위한 욕망이라는 설이 지배적입니다. 

 

영조는 다혈질이고 변덕이 심해 보였지만, 매우 정치적인 인물로 냉정하게 계획적으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덕분에 후반기에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습니다. 임금 중 가장 오래 살았고, 재위 기간도 가장 길었습니다. 

 

업적 중에 탕평책과 함께 균역법 실시가 있었고, 서원철폐가 있습니다. 가혹한 형벌을 완화하고, 백성을 위해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켰습니다. 

 

능은 경기도 양주에 있는 원릉입니다. 

 

조선 후기에 영조, 정조시대가 마지막 태평천하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영조가 그 기틀을 잡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서 죽게 한 일은 비극이긴 하지만, 영조의 성격을 알게 하는 단면이 아닌가 합니다. 

 

22. 정조 : 1752~1800, 재위 1777~1800

 

조선 제22대 왕으로 이름은 산, 외자입니다. 영조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사도세자, 어머니는 혜경궁 홍씨입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바른 자세와 성실한 학업을 정진하여 영조의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초기에 홍국영을 통해 권력 안정을 꾀하였고, 그가 권력을 남용하자 물러나게 하고, 직접 탕평책을 계승하여 정권은 이끌어 갔습니다. 

 

규장각을 세워 당파에 물들지 않은 신하를 길러내려고 했고, 본인도 유학에 있어서 신하들이 넘볼 수 없는 학문의 대가를 이루었습니다. 보수적인 학문관,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실 개혁에는 적극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서얼의 관직 진출에 힘썼고, 이양선 출몰에 대한 대응방식을 정리했습니다. 정조의 통치방식이 유효했던 것은 치밀하고 지속적인 관리로 실제 백성들에게 안심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정조 시기에는 정조의 정치에 찬성하는 남인, 소론, 일부 노론이 시파를 형성하고, 시파에 반대하는 벽파로 나뉘어 새로운 당파싸움의 형태가 생겼습니다. 

 

정조는 조선을 개혁하여 조선 초기로의 복귀를 꿈꾸었습니다. 왜냐하면, 정조 본인이 송시열만큼 주자학의 신봉자로 정통 유교주의였기 때문입니다. 

 

정조는 세종과 함께 대왕이라 불릴 만큼 훌륭한 군주였습니다. 정조 이후 조선은 급속히 쇠락합니다. 정조에게 아쉬웠던 점은 당시 중국을 통해 세계 변화에 대한 이해 부족이었습니다. 구한말 개혁세력이 아닌 정조가 좀 더 일찍 세계 변화의 흐름을 눈치챘다면, 조선의 개혁은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23. 순조 : 1790~1834, 재위 1800~1834

 

조선 제23대 왕으로 이름은 강, 외자입니다. 정조의 둘째 아들입니다. 정조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가 죽자 11세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순조는 수렴청정 초기에 집권세력인 벽파의 정책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3년에 걸쳐 시파와 손잡고 벽파를 몰아낼 정도로 총명했고, 결단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순조 시대에는 당파싸움이 아닌 안동 김씨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세도정치 형태가 발생했고, 이는 부정부패, 관직의 매점매석, 조세제도의 혼란 등으로 농민층이 몰락했고, 민행이 흉흉해졌습니다. 

 

홍경래의 난이 발생하고, 전염병으로 10만 명이 죽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순조는 정치문제를 비변사에 맡기고 본인은 민생을 챙겼지만, 왕실 독자적으로 추진해 전혀 실효성이 없었습니다. 

 

순조 말년에는 이마저도 효명세자에게 넘기고 정사에 열의를 잃었다고 합니다. 능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인릉입니다. 

 

조선의 본격적인 몰락이 시작되었습니다. 안동김씨라는 외척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자 아무런 내부 견제세력이 없었고, 국가의 모든 운영제도가 망가졌습니다. 왕도 개혁에 의지가 없었으니 당시 관리들이 얼마나 부패가 심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24. 헌종 : 1827~1849, 재위 1834~1849

 

조선 제24대 왕으로 이름은 환, 외자입니다. 순조의 손자로 8세에 즉위를 했습니다. 당시 기득권 세력인 안동김씨에게 의지해 정치생활을 했습니다. 

 

15세부터 친정을 했고, 세도정치에 맞서 외척세력을 비중을 줄여나가던 때에 본인 세력도 갖추기 전에 후가 없이 2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재위 기간 동안 전염병과 수재가 자주 일어났고, 삼정문란으로 민란이 일어났습니다. 한국인 신부 김대건을 처형하는 등 천주교 박해사건도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영국, 미국, 프랑스 등 군함이 출몰이 많아졌습니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경릉입니다. 

 

조선 후기의 왕들은 제대로 임금 수업도 받지 못했고, 적절한 정치세력화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즉위를 하여 정권을 휘어잡지 못했고, 그래서 올바로 정치를 펼칠 수 없었습니다. 서구세력이 한창 산업화를 하고 있을 때 조선은 국가의 성장동력을 잃어버렸습니다. 

 

25. 철종 : 1831~1863, 재위 1849~1863 

 

조선 제25대 왕으로 이름은 변, 외자입니다.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손자입니다. 부인은 철인왕후 김씨입니다.

 

철종은 형의 옥사를 계기로 유배되어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조의 아들로 입적하여 형식요건을 맞추고 왕권을 이었습니다. 당시 대권을 이어받을 정통성 있는 인물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친정을 시작하고 삼정의 문란을 지적하고, 수령들에게 경고를 했지만 안동 김 씨 세력 앞에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진주를 시작으로 삼남지방에 민란이 발생했고, 백성은 점점 더 살기 어려워졌습니다. 

 

철종은 총명했으나, 본인의 출신이 정통성을 갖기 어려웠고, 안동김씨 등 당시 우호적인 세력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허수아비 왕으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철종도 33세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고, 능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에 있는 예릉입니다.

 

유배되어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다가 왕이 된 철종이 제대로 된 정치를 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당시 세상은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왕들은 계속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 조선은 정통성을 확보하기 점점 더 힘들어졌을 것 같습니다. 정통성 확보를 못하면 신하들의 지지을 받기 어려워 제대로 정치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6. 고종 : 1852~1919, 재위 1863~1907

 

조선 제26대 왕으로 이름은 희, 외자입니다. 아버지는 흥선대원군이고, 부인은 명성황후입니다.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했는데, 고종이 20세가 넘도록 대원군이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명성황후의 도움으로 대원군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찾았습니다. 이로 인해 민씨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군인들의 급료 체불로 임오군란이 발생해 해결을 위해 대원군을 불러 들었다가, 대원군이 청에 납치되고 명성왕후가 복귀하자 청에 예속이 심해졌고, 갑신정변 이후 친청 온건파가 힘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거문도 사건으로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세력을 견제하려 했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대원군을 중심으로 갑오개혁을 단행했고, 이후 삼국간섭으로 친러파 내각을 만들었습니다. 이에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왕후를 살해하자 아관파천을 합니다.

 

이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조선 식민지화에 대한 승인을 받고, 을사조약을 통해 외교권을 박탈했습니다. 헤이그 밀사를 파견하여 부당함을 알리려 했으나 실패하여 결국 고종은 강제 퇴위를 당합니다. 

 

결국, 1910년 식민지가 됩니다. 그의 능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홍릉입니다. 

 

고종시대에는 많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고종은 대원군의 쇄국정책,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 을사조약, 헤이그밀사, 한일합방 등 엄청난 시대적인 사건을 겪었습니다. 조선의 임금으로서 나라가 멸망해가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본 사람인데 마음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27. 순종 : 1874~1926, 재위 1907~1910

 

조선 제27대 왕으로 이름은 척, 외자입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입니다. 대한제국 제2대 황제입니다. 

 

어릴 때부터 병약하고 소심했다고 합니다.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되고 즉위했습니다. 한일합방까지 3년간 일본은 순종을 국가 병합의 수순에 이용했습니다. 

 

아침에 고종 문안을 드리고, 친일 대신을 접견하고, 훈장을 수여하는 것 외에는 일이 없었다고 하니, 이미 국가는 일본이 장악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10년 일본 황제에게 통치권을 넘기고 창덕궁에서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유릉입니다.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한일합방 마지막 단계를 밟기 위해 일본에게 이용당했습니다. 당시 격변기에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으니 평생 불안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합니다.  

 


 

조선왕조실록만큼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기록한 역사물을 세계에 없다고 합니다. 덕분에 우리는 한 나라의 임금이라고 해서 마냥 행복하게 살고, 멋진 인생을 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냥 금수저처럼 살았던 것이 아니라 불안, 공포를 느끼며 살았던 불행했던 임금들도 많았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현재 우리가 금수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마냥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러워할만한 위치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조차 그 기간을 따져보면 실제로 길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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