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산, 용의 출현을 보고 다시 한번 이순신 장군의 멋진 모습을 되새겼습니다. 실제 한산대첩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려낸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이순신 장군이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을까 궁금해서 책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1. 영화 한산에서 비친 이순신 장군의 전략
한산대첩의 승리는 바로 학익진을 펼친 전략이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이순신 장군도 목숨을 걸고 시뮬레이션한 전략입니다. 영화 한산에서는 이순신 장군 꿈에 거대한 성벽이 나오는 장면과 방어가 곧 공격이 되는 전략이라는 실마리를 찾는 과정에서 학익진을 생각하게 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학익진은 이순신 장군이 최초로 사용한 전략은 아니고, 조선 수군에서 종종 사용하는 전술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적절한 장소에서 확실한 진영을 갖춰야만 효과가 있는 전술이기 때문에 굉장한 연습이 필요한 전략이라고 하네요.
실제 영화 한산에서 보면, 이순신 장군이 학익진 연습을 위해 끊임없이 판옥선을 신속하게 회전시켜 학익진을 만드는 훈련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역사책을 보아도 이순신 장군은 새벽에도 혼자 순찰을 돌고, 훈련을 엄청나게 혹독하게 시키는 장수로 나옵니다.
그만큼 연습과 훈련이 잘 된 상태였기 때문에 한산에서 학익진으로 승부를 걸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학익진이 의미가 있으려면 학의 날개안으로 적군이 달려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유인하는 것이 결국 전략의 핵심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게 유인을 하기 위해서 이순신 장군은 일본 수군의 전략을 거꾸로 이용했습니다. 일본 수군의 승리 공식은 빠른 배를 이용해 적선에 붙이고 조총을 쏘며 상대 배로 진입하여 백병전을 하는 전술입니다. 그리고, 조선 수준이 원거리에서 함포를 쏘는 전술인데, 일부러 접근전을 펼쳐 준 것입니다.
영화 한산에서도 200보 이내로 조선 수군이 접근하면, 스피드가 빠른 일본 군함이 순식간에 근접전을 펼쳐 승리할 것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순신 장군은 목숨을 걸고 그들이 원하는 거리만큼 좁혀 유인한 것입니다. 승부는 바로 200보 밖에 안 되는 짧은 거리에서 순식간에 학의 날개를 펼치는 것이었죠.
한산대첩에서의 조선수군은 이순신 장군에 의해 충분히 훈련된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영화 내용에 보면 화약과 조란탄을 섞어서 최대치의 화약을 실으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조란탄은 근접전에서 사용하는 탄으로 화포에 작은 쇠구슬을 채워 사방으로 쇠구슬이 발사되도록 하는 탄약입니다.
조란탄이 터지면 마치 기관총이 미친 듯이 발사되는 효과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된 함선들에서 학익진으로 에워싸고 불과 수십 보를 남기고 동시에 화포를 일본 수군에 발사했으니, 일본군은 순식간에 전멸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물론 조금만 늦었다면 백병전으로 조선군의 피해가 더 컸을지도 모릅니다.
2. 임진왜란에서의 일본 수군
이순신 장군을 이해하기 위해서 책을 한 권 읽었는데,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란 책입니다. 이 책은 일본 해군 출신 3인이 공저한 책으로 일본인이 바라본 이순신 장군과 일본 수군에 대한 글입니다. 일본인들은 우리만큼 이순신 장군을 분석하고 연구를 했던 것 같습니다.
잠시 책의 내용을 풀어서 설명드리면,
당시 원정군은 승리에 취해 밤새워 술을 마시는가 하면, 서로 속여가며 공명을 다투었다고 합니다. 영화 한산에 보면 그런 장면이 가끔 보였는데,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는 장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책에 언급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차이는 큰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장군의 존재였습니다.
조선이 체계가 잡힌 군령과 전략을 세우고 수행할 수 있는 군기가 잡힌 군대였다면, 일본은 매우 단순한 군령만으로 큰 전쟁을 치렀다는 것입니다. 개개인의 용맹함은 일본 수군이 더 뛰어났을지 모르지만, 군대를 전략에 의해 움직이는 힘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명장이 없었다는 의미겠죠.
그 단면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9명의 장군에게 수군에 대한 동일한 권한을 맡기고, 지켜야 할 약속 7개만 군령으로 내렸다고 합니다.
①수군 전체의 의사결정은 다수결로 하고, ②서로 위험하면 신속히 구조하고, ③적의 계략을 탐지하면 서로 공유하고, ④공은 공정하게 가리며, ⑤다른 사람의 공을 훔치지 아니하며, ⑥염탄선은 각 장군들이 2척씩 준비하며, ⑦보고는 감군을 통해서 하고 직접 보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권한을 9명에게 동등하게 준 것도 문제지만, 전쟁 중 군령이 7개밖에 안되고 그마저도 서로 지켜지지 만무한 내용들만 있었으니 일본 수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랬으니 일본 수군이 서로 공을 탐하고, 서로 내부에서 싸웠을 법합니다.
3. 이순신 장군이 연전연승을 거둔 이유와 효과
사실 이순신 장군이 전투마다 승리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본인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어느 수준인지 정확하게 알고, 끊임없이 준비하고, 생각하고,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책을 통해 확인한 이순신 장군은, 한시도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갑옷을 입고 갑판에서 잠을 자고, 달이 밝으면 염탐선을 돌려 잠시도 쉬지 않고 정보를 파악했고, 언제든지 출격할 수 있도록 닻을 반쯤 올린 상태로 야간 대기를 수도 없이 했다고 합니다.
전략을 생각하면 끊임없이 연습을 하고, 수시로 정탐을 통해 적의 위치와 의도를 파악했습니다. 영화에서도 이순신이 정찰을 통해 적의 위치와 전략을 추측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말 같은 정보를 들어도 원균이 엉뚱한 판단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이순신은 하늘이 내린 장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순신의 승리는, 일본으로 하여금 해로가 막혀 이미 육지에 진입한 일본군에게 보급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당시 평양까지 진격한 일본군이 1만 8천 명이었고, 전국에 흩어진 일본군은 19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하루에 필요한 쌀은 1,500석이나 되었는데, 이를 공급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일본 본토에서 해로를 통해 식량을 공급해야 하는데, 육로를 통해 보급을 하다가 보급기간도 길어지고 의병들에게 당해 보급이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현상이 임진왜란 자체를 조선에게 유리하도록 흘러가도록 만들었고, 그 중심에 이순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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