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 가면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을 들려야 하는 이유

역사와 고전

강릉에 가면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을 들려야 하는 이유

월리만세 2023. 1. 25.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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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연휴에 강릉에 2박 3일 여행을 하면서 첫 코스로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에 들렀습니다. 아침식사를 초당순두부 마을에서 먹었는데, 마침 기념관이 근처에 있었거든요. 우연히 방문했던 여행지였는데 의미가 있어 공유드립니다. 

 

 

 

1. 허균, 허난설헌 기념과 둘러보기 

 

우리 가족은 기차를 타고 강릉에 왔기 때문에 아침식사를 마치고 주변 구경하면서 허난설헌 기념관까지 걸어갔습니다. 차량을 이용하시는 분들은 기념관 바로 옆에 작은 주차장을 이용하면 됩니다. 

 

중앙에 허균과 허난설헌의 자료를 모아 전시한 기념관이 있고, 기념관 앞에는 작은 공원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 기념관과 공원도 예전에는 허균과 허난설헌 집안의 마당이었을 것입니다.

 

허난설헌 기념관 입구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작은 공원 건너편에 허균과 허난설헌이 태어난 생가가 있습니다. 으리으리한 대궐일 줄 알았지만, 그렇게 규모는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집을 둘러보면서 이곳에서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웠던 인물이 실제로 살았다고 생각하고 바라보니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허난설헌은 조선 중기 사대부였던 허엽의 딸로 태어났는데, 당시 허엽이 속한 동인 계열은 권력을 잡고 있는 붕당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안동김씨 정도 되는 으리으리한 대궐이 아니었으니까요. 집 규모로만 보면 몰락한 양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기념관을 한 바퀴 둘러보는데 걸리는 시간은 30분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곳의 비밀을 말씀드리면, 기념관 뒤편에 아주 예쁜 아기 고양이 두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딸이 발견하고 고양이 사진을 찍느라 한참을 머물러 있었습니다. 고양이 좋아하시는 분들은 꼭 아기 고양이를 살펴보세요.

 

 

 

2. 허난설헌에 대해 알게 된 점 

 

오래전 학교에서 배웠지만, 허난설헌은 조선중기 여자 시인, 혹은 여자 문인 정도로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까지 자세하게 역사책에 나오지는 않습니다. 

 

기념관 내부를 거닐며 허난설헌의 자료를 보다 보니 그녀는 여성으로서 고달픈 인생을 살았던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바로 슬퍼졌습니다. 허난설헌은 15세에 결혼해서, 2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사이 두 명의 자녀들이 돌림병으로 죽었고, 세 번째 아이는 유산을 했습니다. 시어머니와 갈등이 심했고, 남편은 이를 못 본 체 밖으로만 돌았다고 합니다.

 

결혼해서 12년간,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고, 사랑하는 자녀들은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어머니와 고부갈등이 심한 상태로 지내면서 정신병에 걸리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은 스트레스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녀의 짧은 인생을 생각해 보고, 그 사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해 보니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허난설헌에게 인생을 사는 재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래서, 허난설헌은 시를 썼던 것 같습니다. 그나마, 허난설헌의 친가에서는 여성이 학식을 갖추는 것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웠고 이미 8세에 신동이라는 칭호를 받았을 만큼 재능이 뛰어났으니까요. 그녀의 시를 보면 남편을 그리는 마음도 있고, 아이를 잃은 슬픔을 시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그녀의 시를 보면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시도 있었을 정도로 시에 모든 것을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탈출하기 위해 무언가 필요했을 텐데, 허난설헌에게는 시를 쓰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 강릉이라고 하면, 지금처럼 ktx가 있는 것도 아니고 첩첩산중을 넘어야 갈 수 있는 깡촌이었을 텐데, 얼마나 글과 시를 잘 지었으면 일본과 중국에까지 알려져 천재 시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기념관에는 그녀가 쓴 산문집과 시들이 있는데, 한문으로 적은 글씨체가 정말 정갈하고 예뻤습니다.

 

한마디로 허난설헌이라는 분을 정리해 보자면, 천재로 태어났으나 가부장적인 안동 김 씨로 시집가서 시어머니 등쌀에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살면서 남편 사랑 한번 받아 보지 못하고, 세 명의 자녀가 모두 죽는 아픔을 견디다 못해 못해 27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분입니다. 

 

남기신 유산으로, 짧은 기간 동안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 수많은 시들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여성의 재능을 꽃 피우기에는 쉽지 않은 환경이었을 것이므로 안타깝게 사라져 간 천재 여류 시인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허난설헌이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시인이든, 소설가든 그 재능을 충분히 꽃 피웠을 것입니다.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못했다면 당장 이혼을 해서라도 충분히 자기 재능을 발휘하면서 본인의 행복을 찾았을 텐데 하필 조선시대에 태어나다니 너무 슬픕니다.

 

 

3. 허균에 대해 알게 된 점 

 

허균은 허난설헌의 남동생입니다. 누나는 시인으로 유명했고, 남동생은 소설가로 유명했습니다. 허균 역시 자유분방하게 성장하여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소유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쓴 소설들은 모두 양반사회를 비웃고 이상사회를 꿈꾸었던 내용들이니까요. 

 

광해군일기에 기록된 허균의 글솜씨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글 쓰는 재주가 뛰어나 수천 마디의 말을 붓만 들으면 써 내려갔다. 허위적인 책을 만들기 좋아해 산수나 도참설과 도교나 불교의 신기한 행적으로부터 모든 것을 거짓으로 지어냈다.' 한마디로 대단한 소설가였던 것입니다. 

 

허균의 부친이었던 허엽의 호가 초당입니다. 강릉에 유명한 초당순두부에 붙어 있는 바로 그 초당입니다. 생각해 보니 제가 아침 식사를 했던 곳이 초당 순두부 마을이었는데, 초당이란 단어는 바로 허균 아버님의 호였던 것입니다. 

 

허균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했지만, 기생과 연루되어 파직되고, 청탁을 일삼았다는 이유로 파직되고, 불교를 숭상한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복직되기를 반복하였습니다. 참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던 분입니다. 관직에 뜻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허균을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홍길동전의 저자이기 때문입니다. 홍길동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입니다. 사대부였던 허균이 한글로 홍길동전을 쓰다니 다른 양반들과 확실히 다른 점이 있긴 했나 봅니다. 

 

허균은 호민론을 작성해 위정자들에게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경고했는데, 홍길동전이 바로 그 호민론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분의 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산]입니다. 교산은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란 의미입니다. 사실 교산은 허균이 태어난 사천진 해수욕장 앞의 야산 이름입니다. 그 야산의 모양이 마치 구불구불해 이무기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허균은 홍길동전의 내용처럼 이상향을 꿈꾸다가 결국 실현되지 못한 이무기로 끝난 인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강원도 한구석 강릉에 이렇게 파란만장한 꿈을 꾸면서 살았던 조상님이 계셨을 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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