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연산군 일기에 대하여

역사와 고전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일기에 대하여

월리만세 2021. 5. 16.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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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 

 

몇 년 전에 읽었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역사책의 좋은 점은 생각날 때 반복해서 읽어도 늘 다른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연산군 일기를 읽었는데, 예전에 읽었을 때는 그저 희대의 폭군으로 무고한 신하들과 백성을 많이 죽인 인물로 기억했고, 그 내용이 잔인해서 휙휙 페이지를 넘겼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에 연산군 일기를 읽으면서 생각해 본 것은, 조선의 임금 중에서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면서 살았던 유일한 임금인데 과연 행복한 일생이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1. 연산군이 꿈 꾸었던 군주의 모습

 

세자가 어떤 군주가 되는지는 그 아버지의 모습이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목표를 세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테니까요. 

 

연산군의 아버지는 성종이었습니다. 

 

성종은 조선을 유교중심 국가로 이끌었던 도학 군주로 늘 경연을 통해 대신과 토론을 했고,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 언론기관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에 왕권보다는 신권이 강한 상태에서 통치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연산군은 자연스럽게 강한 군주의 모습을 꿈 꾸었던 것 같습니다. 

 

연산군은 늘 신하들에게 끌려다니면서 본인이 하고픈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고, 그 스트레스를 혼자 삭히는 성종을 보면서 강력한 왕권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성종은 자기 취미생활이었던 매 사냥도 신하들 때문에 마음대로 못했다고 하니 생활에 많은 제약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연산군에게는 어머니가 서인으로 폐위되고, 사약을 받았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분명히 어렸을 때 어슴프레 알고 있었지만, 왕위를 물려받기 전에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 모르는 척했을 수 있습니다. 

 

신하들에게 끌려다니는 정치로 일관했던 아버지,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 수수방관했던 대신들에 대해 좋지 않는 감정을 가진 상태에서 왕위를 물려받은 연산군이 폭군이 된 것은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연산군은 수시로 "위를 능멸하는 풍습은 고치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이 부분을 잘 생각해 보면 기회가 오면 마음에 안 드는 무리를 모두 청산하겠다는 의미로 해석이 될 수도 있을 듯합니다.  

 

연산군은 절대 넘볼 수 없는 왕권을 구축하고 그 강력한 왕권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 지상목표였던 것입니다. 조선왕조에 많은 왕들이 있었지만, 가장 독특한 군주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2. 연산군 일기에 나온 주요 사건들

 

연산군은 유교정치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경연 수업을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중에 권력을 되찾은 뒤에 경연을 폐지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취미로 매와 사냥개를 마음껏 길렀습니다. 아버지 성종이 대신들의 반대로 못했던 것을 비웃듯이 자유롭게 행동했습니다. 연산군은 사생활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 궐내의 소문이 밖으로 나가면 본보기로 곤장을 많이 내렸다고 합니다. 

 

결국, 폐비윤씨 사사 사건을 공론화하여 일어난 갑자사화를 기회로 연산군은 공포정치를 시작합니다. 연산군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음에도 대신들을 공격할 때를 기다려 갑자사화를 통해 한번에 복수를했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폐비에게 사약을 내릴 때 관여한 모든 대신들은 사형을 당했고, 이미 죽은 사람은 무덤에서 꺼내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를 했습니다.  

 

노여움을 크게 산 대신은 부관 능지를 당했는데, 죽은 시신을 꺼내 머리, 팔, 다리를 모두 자르는 처벌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지를 자르는 능지를 당하고, 효수한 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그 해골을 빻아 바람에 날리고, 그 대신의 집은 파서 연못을 만들고, 부모, 형제, 자식, 사위를 모두 목을 잘랐다고 합니다. 

 

이것이 모두 "위를 능멸하는 풍습이 바로잡힐 때까지 고문하고 죄를 엄하게 다스리겠다!"는 연산군의 일관된 지시였다고 합니다. 

 

연산군이 위를 능멸했다고 하여 죽인 이유를 살펴보면, 신하가 스스로 높은 체하여 군주를 능멸했다는 이유로 죽이고, 간사한 생각과 거짓 충성으로 3년간 소식을 했다는 이유로 죽이고, 시를 지어 바칠 때 혼자만 튀어 보이려고 남들이 한 편 지을 때 두 편을 지어 바쳤다고 죽이고, 중국 수박을 먹고 싶다고 했을 때 반대한 사람도 죽였습니다.

 

이렇게 대신을 다스리다 보니 어느덧 연산군 1인 독재체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본인의 가마를 대신과 대간에게 메도록 해서 왕권을 넘보지 못하도록 늘 대신들로 하여금 경계하도록 했다고 하니, 이런 임금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조정의 재정도 마구 탕진하면서 놀았는데, 악공 1천명, 기녀 1천 명을 뽑아 수시로 잔치를 했습니다. 이때 선발한 기녀는 흥청과 운평이라고 불렀는데, 운평 중에 얼굴이 예쁘면 흥청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기녀였던 흥청조차 엄청난 권력을 누렸는데, 가족들에게 땅과 집을 하사하고, 각종 부역을 면제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관리들도 임금과 가까운 흥청들에게 꼼짝 못 해 흥청을 사칭한 사기사건도 많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산군은 후원에 동물원을 만들었는데, 구경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사냥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곰과 호랑이도 잡아와 가두어 두고 사냥을 즐겼다고 하니 호화판 1인용 사냥터였습니다.  

 

 

 

3. 연산군의 말년과 죽음

 

연산군은 12년간 통치를 끝으로 쫒겨났습니다.

 

반정을 주도한 인물은 박원종으로 월산대군 부인 박 씨의 동생입니다. 문무에 능했고 연산군의 폭정에 옆에서 조용히 지냈던 인물입니다. 

 

주변의 신뢰를 받았던 박원종이 반정을 일으키자 신하들은 물론 백성들까지 합세하여 매우 손쉽게 반정에 성공했고, 연산군은 순순히 옥쇄를 내주었다고 합니다. 

 

이후 연산군은 왕자의 신분인 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귀향을 갔고, 부인 신씨는 사저로 보내졌습니다. 연산군의 아들들은 모두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연산군은 폐위된 지 겨우 두 달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거의 치유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서야 조정에 보고된 것으로 보면, 무언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듯합니다만, 상식적으로 그런 폭정을 했던 임금의 병을 살뜰하게 보살폈을 리 만무합니다. 

 

연산군의 마지막 유언은 부인 신씨가 보고 싶다는 말이었습니다. 연산군은 강화도에 묻혔다가 부인 신 씨의 청에 따라 방학동 현재 위치로 이장했으며, 부인 신 씨도 죽고나서 그 곁에 묻혔다고 합니다. 

 

왕권을 강화해서 백성을 보살핀 것이 아니라 본인의 향락을 위해서만 권력을 사용했던 연산군은 쓸쓸하게 죽었고, 그 묘도 다른 왕에 비해 매우 초라했다고 합니다.

 

어떤 인생을 살던 그것은 본인의 선택이라고 하지만, 연산군은 흔하게 보기 힘든 인생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4. 하고 싶은 이야기

 

연산군 일기를 두 번 정도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연산군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살펴보았고, 두 번째는 이렇게 살았던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고민을 해 보면서 읽었습니다.

 

왜 그렇게 복수심에 불탔는지, 신하들을 죽여서 얻은 왕권으로 하고 싶었던 것이 본인의 욕망을 채우는 일 뿐이었는지, 죄책감이나 두려움은 없었는지 궁금했습니다.  

 

12년간 세상의 어떤 사람도 누릴 수 없는 강력한 권력을 누렸으니 연산군은 행복했을까요? 

 

연산군의 일생을 보면서 어릴 때 잘못된 가치관을 갖게 되었을 때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습니다. 또,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평범하게 성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수 있습니다. 

 

연산군은 권력자인 아버지가 자기 어머니를 독약으로 죽인 집안에서 성장했으니, 어린 연산군의 정신상태가 정상일 수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도 제대로 못 받은 데다가 주변 사람들이 온통 복수의 대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도 향락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연산군을 보면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1천명의 기생과 흥청망청 살았음에도 죽을 때 유언이 부인이 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하니, 그런 환락적인 생활이 모두 부질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이 많아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즐기고, 수많은 여인들과 자유연애를 즐기며 사는 재벌들조차 나이들어 병들고 죽을 때가 되면 초라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들의 죽음이 초라해 보이고 무상해 보이는 것은 정신적인 원숙함이 부족한 상태에서 죽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철 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 같은 종교 지도자들의 죽음을 보면 사회에 어떤 좋은 의미를 남기고 떠나기 때문에 그 죽음을 의미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적인 수양이 뒷받침 되지 않는 부귀공명은 크게 부러워할 것이 아닌 듯합니다. 

 

 

 


 

정리하며, 

 

조선왕조실록은 인생을 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줍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만화로 되어 있어서 쉽게 쉽게 들쳐볼 수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내용이 부실한 것도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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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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