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비 :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함께한 개혁정치

역사와 고전

조대비 :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함께한 개혁정치

월리만세 2021. 6. 8.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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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 

 

최근에 한동안 방구석에 곱게 모셔둔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전집을 사 두었는데, 태조실록, 세종실록, 정조실록 등 유명한 임금에 대해서만 읽고 한동안 보지 않고 있었습니다. 

 

지금 고종실록을 읽고 있는데, 신정왕후 조대비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신정왕후 보다 조대비라는 말이 더 익숙할 것입니다. 학교에서 배운 국사책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조대비는 철종 시대의 풍양 조 씨의 세도정치 부분에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제 기억에도 조대비는 풍양 조씨로서 세도정치 시기에 살았던 인물로만 알고 있었는데, 고종실록에 나온 신정왕후 조대비의 삶이 멋지게 생각되어 블로그로 남겨보려고 합니다. 

 

신정왕후 조대비에 대한 삶을 짧게라도 한번 살펴보실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최근에 철인왕후라는 드라마의 조연희 배우께서 조대비 역할을 연기를 하게 되어 세간의 관심이 되었던 분입니다.  

 

 

1.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 계기

 

신정왕후 조대비는 조선왕조 24대 헌종의 어머니입니다. 우리에게는 조대비로 더 알려져 있으며, 본관은 풍양 조 씨입니다. 당시 풍양 조 씨는 안동 김 씨와 함께 세도정치 세력으로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조대비는 순조 임금의 장남 효명세자의 빈으로서 헌종을 낳았습니다. 결국, 조대비는 헌종의 어머니인 것입니다. 이후 헌종이 조선의 임금으로 즉위를 하자 조대비의 남편이었던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지위 상승이 되면서, 조대비는 왕대비가 됩니다. 

 

조대비는 수렴청정을 하기 전까지 궁중에서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고 합니다. 세도가로 이름을 떨치던 풍양 조씨의 힘이 약해지고 안동 김 씨의 세력이 강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조대비는 헌종의 어머니이지만, 헌종이 8세로 임금이 되었을 때 수렴청정을 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시대에 수렴청정은 왕실의 가장 어른이 하도록 하는 관례가 있어, 당시 순조비였던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던 것입니다.

 

이후 순원왕후가 별세하고 대왕대비가 되어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고, 철종이 죽고 왕위 계승자가 고종이 되자 수렴청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조대비는 안동 김씨를 배경이었던 순원왕후와 철종이 죽고 전면으로 등장한 것인데, 여기서 흥선대원군이 역할을 하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 알고 있는데, 흥선대원군이 조대비에게 본인의 둘째 아들을 조대비 남편인 익종의 아들로 삼아 대를 잇자고 제안을 한 것입니다. 

 

조선의 후기에 들어서면서 임금들이 일찍 사망하는 일이 많아 이런 일들이 벌어졌던 것 같습니다. 조대비는 흥선대원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종을 즉위시키고 본인이 수렴청정을 하면서 최고의 권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흥선대원군의 지혜가 엿보이는데, 당시 흥선대원군에게는 첫째 아들이 있었음에도 둘째 아들을 조대비에게 보냈는데 그 이유는 나이어린 둘째 아들을 즉위시킴으로써 조대비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부분은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인 거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대비는 수렴청정이라는 권력의 정점에 설 수 있었고, 흥선대원군은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해서 정치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대비는 고종의 나이가 15세가 되자 전례에 따라 수렴청정을 중단했는데, 수렴청정을 했던 기간은 총 2년 3개월이었습니다. 이후 조대비는 고종 27년까지 생존했고 83세의 나이로 경복궁에서 돌아가셨습니다. 

 

 

2.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은 서로 업무분장을 잘 해서 정치개혁을 추진했던 파트너 같은 관계였습니다. 

 

조대비는 안에서, 흥선대원군은 밖에서 개혁을 추진했고 서로의 영역에 대해서는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개혁 구상을 주로 대신들의 건의 형식으로 전달했고, 조대비는 그것을 언문 하교와 구두지시로 내부 공유를 했습니다. 

 

조대비의 특명으로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에서 궁으로 들어오는 전용문을 만들었지만, 흥선대원군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서로 역할을 나누어 그 둘은 비변사 해체와 경복궁 복원사업, 만동묘 철폐 등 굵직한 개혁정책을 함께 실행하였습니다. 조대비는 흥선대원군에게 이용을 당한 것이 아니라 왕실 재건이라는 뜻을 함께 한 개혁의 주체였습니다. 

 

이처럼 수렴청정 기간 동안 신정왕후 조대비는 주도적으로 정국 운영에 참여하며 왕권 강화와 왕실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정인 풍양 조씨의 가문에 특혜를 주는 일도 없었으니 중립성을 유지하는데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고종 1년 종친들을 전원 합격자에 넣으라는 하교를 하면서 풍양 조 씨도 합격자 명단에 넣으라는 지시를 했지만, 조대비가 강력하게 반대하여 별도의 특전을 베풀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대비가 이렇게 흥선대원군과 조선의 개혁정치를 진행했던 이유는 남편 익종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래전 임금이 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남편의 정치적 뜻을 위해 이렇게 했다는 것이 사실 잘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조대비는 수렴청정을 2년 3개월간 하다가 고종이 15세가 되던 해 권력을 내려놓고 조용히 지냈다고 합니다. 

 

어느 아내가 남편의 뜻을 위해 이렇게 오랜시간을 견디며 참다가 권력의 정점에 서서 이렇게 공명정대하게 업무처리를 하고 아무 잡음을 일으키지 않고 권력에서 내려와 조용히 지내다가 하늘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3. 하고 싶은 이야기

 

저는 수렴청정을 했던 조대비가 정치적으로도 감이 뛰어나고, 마무리가 깔끔했던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안동 김씨의 세력이 득세를 하던 시기에는 존재감을 완전히 감추고 쥐 죽은 듯이 살고 있다가 순정 왕후와 철종의 사망이라는 판세 변화를 감지하고, 흥선대원군과 함께 정치권력을 잡았으니까요. 

 

사실 흥선대원군 이하응 또한 안동 김씨 세도정치 아래서 한직을 떠돌던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입니다. 이들 둘이 힘을 합쳐 권력을 잡고, 서로 역할 분담을 해 조선의 개혁정치를 이끌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조대비는 관례에 따라 고종의 나이가 15세가 되자 깨끗하게 물러났는데, 수렴청정 기간이 고작 2년 3개월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권력이라는 것은 한번 잡게 되면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인지상정인데, 조대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83세까지 장수한 것으로 보아 건강이 나빴던 것도 아닌데 대단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풍양 조씨의 가문이었으나, 본인의 친정을 보호하거나 가문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지도 않았고,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면서도 한 번도 정치에 무리하게 개입하지 않았다고 하니 본받을 만한 점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신정왕후 조대비의 일생을 돌아보면, 효명세자와 결혼은 했지만 효명세자가 왕이 되지 못해서 중전을 하지 못했고, 오랜시간 쥐 죽은 듯이 지내다가 대왕대비가 돼서야 비로소 수렴청정을 하면서 권력을 잡게 되지만, 2년 3개월 정점에 머물러 있다가 스스로 깨끗하게 접고 내려왔습니다. 

 

궁중에서 83세까지 지내시면서 이 분이 행복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최소한 불안과 걱정으로 살지는 않았을 것 같았습니다. 본인이 나서야 할 때와 참아야 할 때를 알고 있었고, 권력을 잡고 있을 때조차 무리하게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무리 없이 생을 보내셨을 듯합니다. 

 

국사책에서는 조선후기 역사 부분에 아주 짧게 나오는 조대비라는 인물을 조금 더 자세히 알고 보니, 생각보다 괜찮은 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정리하며, 

 

과거의 역사적 인물을 살펴보는 것은 마음의 갈등을 평안하게 만드는데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저는 조선왕조실록을 높이 평가하는 편인데,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오랜 세월의 기록을 아주 자세하게 남긴 것에 대해서는 정말 훌륭한 업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후손들이 과거 조상들의 생각과 행적을 보면서 또 여러가지 반성과 발전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도 마음의 갈등의 생길 때 가끔 비슷한 갈등을 겪었던 실록의 인물을 보면 반갑기도 하고 반면교사가 되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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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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