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업적 : 비변사 폐지,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역사와 고전

흥선대원군 업적 : 비변사 폐지,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월리만세 2021. 6. 12.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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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 

 

우리가 알고 있는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의 아이콘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배운 바로는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개화가 늦어져 조선의 빠른 근대화를 저해한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즉위(1863년)를 하면서 권력을 쥐게 되었고, 1898년 사망하기까지 35년간 본인 나름대로 조선을 개혁하기 위해 살았던 분입니다. 

 

비록 세계변화의 흐름을 보지 못하고, 내부개혁만으로 발전을 해 보려고 했던 정책방향이 맞지 않아 비판을 받고 있지만 당시에 진행했던 업적은 인정할 만한 것이 많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사망한 1898년과 지금 2021년의 차이는 불과 123년입니다. 지금은 대한민국이 G7에 참여할 정도로 국력이 강해졌다고 말하는데 겨우 100~150년 전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겨우 100년만에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이용하려는 외세를 극복하고, 이만큼 성장한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당시 핵심 개혁세력이었던 흥선대원군에 대해 알아봅시다.  

 

 

1. 비변사 폐지

 

흥선대원군과 조대비가 합심해서 개혁의 첫번째로 꼽은 것은 비변사 폐지였습니다. 

 

비변사는 왜란과 호란을 경험하면서 외세침력에 대응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기구였는데, 설치되고 수백 년간 해체되지 않고 권력기구로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오직 비변사만이 국가의 기밀을 다룰수 있고, 군사 지휘의 중요 의사결정을 하다 보니 의정부를 무용지물로 만들었고, 세도정치 세력들이 비변사를 장악하면 다른 기관들이 힘을 쓸 수 없는 문제점을 없애고자 했던 것입니다. 

 

비변사의 역할을 보니 국정원을 특정 세력이 장악했던 형태나 계엄사령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왕권을 종이조각 취급할 수 있었던 제도였으므로 흥선대원군 입장에서는 제일 먼저 없애려고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은 비변사의 기능을 의정부와 통합하는 형태로 운영하다가 폐지해버렸습니다. 

 

이후 비변사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의사결정 권한은 의정부로 돌려주고, 군사운영과 관련된 업무는 삼군부에 맡겨 군사지휘 권리를 회복해 주었습니다. 

 

특정 기구에 중요 정보와 권력이 모이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 기구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특정 이익집단의 소속만으로 채워지거나, 생각이 삐뚤어진 사람이 핵심 요지를 맡게 되면 정상적인 조정기능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나쁜 것입니다. 

 

힘의 균형과 권력의 분산이라는 개념은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투표를 통해 정치참여를 쉽게 할 수 있는 우리로서는 늘 권력이 한 집단에게 몰리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2. 서원 철폐

 

고종 1년, 조대비는 전국 서원의 실태조사를 했습니다.

 

서원은 원래 조상에 대한 제사와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구였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서 정치세력화되어 붕당정치의 근거지가 되곤 했습니다. 

 

서원이 전국 1,000여개가 넘어가면서 지방권력기관처럼 백성 위에 군림을 했고, 사대부들의 근거지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입니다. 

 

이에 고종 2년 만동묘 폐지를 명령했는데, 만동묘는 송시열의 뜻에 따라 제자들이 세운 사당으로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이것이 서원 철폐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어서 고종 5년 본격적인 서원 철폐를 진행합니다. 

 

사적으로 운영했던 서원을 국가 소속으로 관리하고, 보유 토지에 대한 면세혜택을 없애고, 그 관리를 고을 수령이 한다는 정책을 발표합니다. 최종적으로 47개 서원만 남기고 모두 헐어버리도록 명령을 하죠. 

 

유생들은 흥선대원군의 눈치를 보면서 소극적으로 저항을 하면서 모면을 해 보려고 했지만, 흥선대원군은 고종 8년 추가로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곳을 적발하여 깔끔하게 없애버렸습니다. 

 

국가 전체에 퍼져있었고, 양반들의 세력 근거지였던 서원을 단 3년 만에 정리해 버린 것은 상당히 급진적인 정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만큼 당시 흥선대원군의 힘은 강력했던 것 같습니다. 

 

이는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하고 부터 세도정치를 했던 안동 김 씨, 풍양 조 씨보다 이 씨를 중심으로 등용을 많이 했고, 세도 정치인들에게 소외되었던 세력을 대거 등용하면서 힘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3. 경복궁 중건

 

흥선대원군이 꿈꾸었던 조선은 붕당정치나 세도정치가 없고, 삼정문란과 같은 세금제도가 안정되어 백성들이 곤궁하지 않고, 왕권이 튼튼히 자리 잡고, 신하도 신하의 직분에 맞게 충실한 나라였습니다. 

 

조선후기 관직매매가 성행하고, 백성들에게 돈을 뜯어 내고, 왕권이 약했던 어린 왕을 배경으로 세도정치가 득세를 했으니 흥선대원군으로서는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이 중 경복궁 중건은 왕권강화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소실된 경복궁을 볼 때마다 쇠락한 왕실로 비쳐 보이는 것을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고종 2년에 경복궁 중건을 발표하고, 고종 5년에 주요 공사를 마무리했다고 하니 3년간 굉장히 강하게 밀여붙였던 사업으로 보입니다. 

 

요즘도 큰 아파트 단지를 공사하는데 2~3년이 걸리는데, 100년 전 별다른 중장비도 없이 궁궐을 재건축하는데 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하니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볼 수 있는 경복궁을 다시 멋지게 지어 놓은 흥선대원군의 업적은 인정을 하지만, 반대로 부작용도 상당히 많았던 사업이었습니다. 

 

재정이 부족한 가운데 정부의 의지만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폐해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조대비가 대비전에서 10만냥을 내고, 종친들에게 성금을 거두었지만 턱없이 공사비가 부족했습니다. 

 

부역에 동원된 사람들도 부족했고, 부역을 피하기 위해 돈을 걷는 행위도 성행을 했습니다. 백성들에게조차 자발적인 헌납을 유도했으나 부족하여 새로운 화폐를 발생해서 해결해 보려고 했으나 큰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기존의 상평통보를 당백전으로 교체하는 것인데, 당백전은 상평통보 100전과 같은 가치로 발행했던 것입니다. 100배의 가치가 있다 보니 가짜 당백전을 주조하는 경우가 많아져 불신이 높아졌고, 시중 가치는 떨어졌습니다. 

 

위조지폐 발행자를 처벌하면서 당백전을 활성화 시키고자 정부의 모든 세금을 당백전으로 거두게 했는데, 관리들은 지방세금은 상평통보로 받고, 상납은 당백전으로 내면서 차액을 취득하기도 했습니다. 

 

완공되지 1년전인 고종 4년에는 문세까지 만들어 성문을 지날 때마다 세금을 거두기도 했다고 합니다. 국가사업을 하느라고 백성들에게 세금 명목으로 많이 거두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과거보다 세금을 많이 거두고 있는데 국민들이 어렵게 납부하고 있는 만큼 알뜰하게 좋은 사업을 위해 사용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4. 하고 싶은 이야기

 

흥선대원군은 매우 전략적이고 용이주도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권력을 잡기 전까지 숨을 죽이며 나라의 폐단을 고민하고 개혁을 준비했고, 권력을 잡고 매우 강력한 리더십으로 개혁을 밀고 나갔습니다. 

 

역사적인 평가에 의하면 흥선대원군은 5척 단신이었지만 온몸에 담력이 가득하고 용맹하며 과감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비변사 폐지, 서원 철폐와 같은 기존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히 흥선대원군은 매우 빠르게 개혁을 진행해 저항세력에게 틈을 주지 않았고,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같은 외세침력을 활용해 지지기반을 결속해 사대부들의 반발을 효과적으로 막았습니다. 

 

비변사 폐지, 만동묘 폐지, 경복궁 중건 등 굵직 굵직한 개혁 명령이 불과 5일 사이에 나왔다고 하니 모든 것이 천천히 느릿느릿 진행되던 조선시대에 얼마나 빠르게 움직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섭정을 시작하고 10년 후 실각을 합니다. 비록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늦추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조선 후기에 병폐였던 문제점에 대해 많은 개혁을 성공시켰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쇄국정책조차 본인의 개혁에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시기적으로 맞아 떨어졌으니, 흥선대원군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는 산업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국가들은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모두 침략을 당할 운명이었으니, 조선 후기 정권을 누가 잡더라도 외세의 침략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근대화가 가장 늦은 축에 속했고, 식민지 생활까지 했음에도 100년 후 세계 10위의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조상들의 생각과 활동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이해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흔히 종특이라고 이야기하는데, 확실히 역사를 읽다 보면 우리나라만의 종특이 존재하는 듯합니다. 

 

늘 어떤 무언가 불합리한 시대가 있는데, 이상하게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길어야 10년 내외로 누군가 뒤집어 엎습니다. 

 

일제식민통치 35년은 비교적 긴 억압의 시기였는데, 국력이 워낙 부족해 일본의 패전으로 광복을 맞이했지만, 정말 끊임없는 독립운동을 했으니, 불합리한 것을 참지 못하는 종특이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정리하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우리 조상들의 훌륭함을 새삼 느낍니다.

 

다른게 아니라 우리 역사를 그 옛날부터 촘촘하고 세밀하게 기록을 해 놓은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책을 편찬해 놓은 것은 정말 대단한 업적입니다.

 

그 옛날 사람들의 생각과 사고방식, 생활을 눈에 보이는 듯이 상상할 수도 있고 지금 사회와 비추어 시사점을 얻는 것도 매우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배운다고 하면, 이 정도의 자세한 사료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조선왕조실록은 정말 훌륭한 우리나라 문화유산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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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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