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에 대하여 : 역사적 의미와 실패이유

역사와 고전

갑신정변에 대하여 : 역사적 의미와 실패이유

월리만세 2021. 7. 3.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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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 

 

우리가 국사시간에 '갑신정변'에 대해 배울 때 상세한 내용까지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선말 개혁파 중 김옥균을 중심으로 친일 성향이 높은 개화 세력이 일으킨 정변으로 3일 만에 실패한 혁명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험문제에서도 갑신정변은 구한말 개혁사건을 연도순으로 나열할 때 자주 나오곤 했지만, 갑신정변 자체에 대한 깊은 내용은 잘 다루지 않았습니다.  

 

갑신정변은 비록 일본에 의지해 일으킨 개혁이었다고는 하지만 구한말 어떻게든 국가를 개혁 해 보고자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갑신정변에 대한 역사적인 의미와 실패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제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복습하고 있어 그 내용을 요약하고, 짧게 제 생각을 추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갑신정변 당시의 상황

 

흥선 대원군이 실각하고, 임오군란까지 발생한 조선의 조정에서는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고종은 국가개혁을 이끌어갈 조직으로 '통리군국사무아문'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을 설치했습니다. 여기서 통리군국사무아문은 '내정과 군정'을 담당했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외교와 통상'을 담당했습니다. 

 

청군에 군사교관을 요청해 위안스카이가 훈련 책임자로 내려왔고, 선진문물 습득을 위해 중국 텐진에 김윤식을 중심으로 파견한 영선사 유학생들이 돌아와 청나라 기계와 장비를 활용해 '기기국'을 세웠습니다. 

 

이때 고종은 의복개혁을 했는데, 조신들의 관복을 흑단령으로 통일해서 입게 하고 사복도 소매를 단정하게 줄여 간편하게 고쳐 입도록 했습니다. 조선 유생들의 심한 반발이 있었으나, 고종은 끝까지 관철시켰습니다. 

 

일본에 수신사로 갔던 박영효의 건의로 한성에 경찰조직인 '순경부'와 출판기관이었던 '박문국'이 설치되었고, 이곳에서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가 발행되었습니다.  

 

1883년 1월에는 태극기가 국기로 제정되어 공포되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고종을 중심으로 차근차근 개혁이 진행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당시 신하들은 온건 개혁파(친청 그룹)와 급진 개혁파(친일 그룹)로 나뉘어 팽팽하게 대립을 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온건 개혁파는 청나라와 친밀한 민비의 친정인 민씨 세력을 중심으로 김윤식, 김홍집, 어윤중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청나라식 개혁인 '양무운동'과 동양의 사상과 전통을 지키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동도서기'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반면, 급진 개혁파는 일본과 친밀한 인물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이 처음부터 일본과 친밀했던 것은 아니고, 온건 개혁파가 청나라에 기대서 추진하는 사업이 사대사상에 빠져 그들의 내정간섭을 용인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다른 개혁 방법을 찾다가 먼저 선진화된 일본 인사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급진 개혁파의 수장은 30대 초반의 김옥균이며 그는 안동 김씨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다음 철종의 사위였던 박영효는 22세로 수신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고, 홍영식은 영의정 홍순목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밖에 서광범, 서재필, 유길준 등이 급진개혁파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수신사, 조선시찰단, 보빙사 등의 일원으로 일본과 미국 등을 다니면서 문명개화를 확인했던 사람들이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본 정계의 실력자들과 교류를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부터 붕당정치, 파벌정치 등으로 세력을 나누어 싸웠는데, 역시 개혁시대에서도 급진 개혁파와 온건 개혁파가 세력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정치체계는 민주주의이지만 역시 여당과 야당으로 나뉘어 다투고 있는데, 과거나 현재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을 매우 한심하고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로 바라보는 분들이 있지만, 오히려 한 세력이 너무 강해 세력 다툼을 할 수 없는 상황도 마찬가지로 리스크가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게 최소 두 개 이상의 세력이 서로의 정책이나 논리를 가지고 다투는 것이 느리지만 좀 더 합리적인 결정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세종대왕급의 명군주가 권력을 잡고, 광개토대왕처럼 일사천리로 밀고 간다면 모를까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아 권력이 한곳에 집중되었을 때 좋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2. 갑신정변

 

개화정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재정 마련을 위해 온건 개혁파는 새로운 화폐인 당오전 발행을 주장했고, 급진 개혁파는 차관도입을 주장했습니다. 

 

급진 개혁파였던 김옥균은 여러차례 일본을 오가며 쌓은 친분을 이용해 일본에서 차관도입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당오전 도입으로 백성의 피해가 커지는 것을 보며 혁명을 꿈꾸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자주독립을 하고, 민씨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일본의 힘을 빌리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차관도입에 실패한 만큼 경제적 지원이 안되더라도 군사적 지원은 가능하리라 본 것입니다. 

 

당시 베트남을 두고 청나라와 프랑스가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이 틈에 조선에서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던 일본이 급진 개혁파와 요구조건이 일치하게 되었습니다. 

 

김옥균은 일본 정부의 지원을 여러 차례 확인했고, 영국 총영사, 미국 공사와 만나 의견을 넌지시 공유했고, 차근차근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그런데, 잦은 개혁파의 회동은 위안스카이의 의심을 샀고, 그는 군사들에게 비상경계령을 내렸습니다. 

 

갑신정변은 우정국 설치를 기념하는 환영식을 거사일로 잡았습니다. 

 

작은 소동을 일으켜 온건 개혁파의 수장이었던 민영익이 제일 먼저 제거되었습니다. 그리고, 급진 개혁파 무리는 창덕궁으로 가 고종의 친서를 받아야 했지만, 일본 공관으로 달려가 군대 지원이 가능한지 확인을 먼저 했다고 합니다.  

 

자체적인 무력지원 기반이 없었으니, 불안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또 그 정도로 혁명을 지원할 무력도 확보해 두지 않은 채 일본만 믿고 정변을 일으켰다는 것이 약간 막무가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일본군은 약속대로 200명을 이끌고 궁으로 도착했고, 김옥균은 친청 세력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계획한 대로 간신을 제거하고 왕을 경우궁으로 모시고 본인들이 생각한 혁신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갑신정변 14개 조입니다. 

 

① 대원군 귀국과 청에 대한 조공 폐지

② 문벌 폐지, 백성 평등권 보장

③ 지조법 개혁, 빈민구제, 국가재정 확보

④ 내시부 폐지

⑤ 탐관오리 처벌

⑥ 환곡 영구 폐지

⑦ 규장각 폐지

⑧ 순사 설치, 도적 방지

⑨ 혜상공국 폐지

⑩ 유배, 금고 중인 죄인 조사 후 석방

⑪ 4영을 1영으로 개편, 근위대 설치

⑫ 국가 재정은 호조로 일원화

⑬ 정시를 결정한 후 국왕께 상신, 정령을 공포

 6조 외 불필요한 관청 폐지 

 

그런데, 이 혁명은 삼일천하로 끝납니다. 

 

정변 3일째 중전이었던 민비가 공간이 너무 좁으니 창덕궁으로 돌아가길 요구했고, 일본이 방어할 수 있다는 약조를 확인하고, 창덕궁 중에서 수비하기 유리한 관물헌으로 고종을 모시고 이동했습니다. 

 

이때 위안스카이는 준비한 군대를 이끌고 궁궐 안으로 밀고 들어왔습니다. 일본군이 방어를 했지만, 그 숫자가 열세여서 철수를 결심하고 왕을 인천으로 모시려고 했으나, 고종이 완강하게 거부하여 갑신정변은 여기서 중단되었습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일본군과 함께 탈출했고, 박영교, 홍영식은 남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스토리를 잘 살펴보면, 참 허무합니다. 

 

혁명 첫날 얼마나 짜릿했을까요? 본인들이 간신이라고 생각했던 무리를 칼로 베고, 왕의 하명을 받아 본인들이 인사권을 장악하고, 매일 밤 논의했던 혁신방안을 발표했을 때까지만 해도 기쁨에 들떴을 것 같습니다. 

 

오랜 기간 국가의 장래를 위해 토론하고 고민했을 텐데, 3일 만에 끝나서 아마도 엄청나게 허탈해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3. 갑신정변 실패 이유

 

갑신정변이 실패를 하고 그 후유증은 작지 않았습니다. 

 

김옥균 등 일본으로 망명한 이들은 조선에서 송환을 요구했고, 자객을 보냈으며, 일본도 이들에게 냉담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좌불안석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또 그 가족들은 모두 역률로 다스려졌습니다. 홍영식의 아버지 홍순목은 손자에게 독을 먹여 죽이고 본인도 자살했습니다. 박영효, 서재필의 가족들도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개혁파 청년들은 모두 색출당해 처형당했습니다. 갑신정변으로 가장 혜택을 본 인물은 정변을 막은 위안스카이였다고 합니다. 20대였던 위안스카이는 당시에 마치 총독처럼 행세를 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국가의 쿠데타를 막았으니 얼마나 대단한 대접을 받았을지 상상이 갑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삼아 급진적으로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메이지유신의 성공요인을 잘못 파악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엘리트 중심의 개혁은 맞지만, 메이지유신은 대중의 지지기반이 있었고, 저항을 자체적으로 막아낼 무력이 있었다는 점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스스로 엘리트라고 자부했던 이들은 대중의 지지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자체적인 무장 없이 일본의 군사력에만 기대어 혁명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왜 일본의 지원에 대해 그렇게 맹신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본인의 인맥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여러 차례 선진문물을 느끼고, 일본에 자주 왕래를 하면서 이들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자부했기 때문일까요? 

 

세상에 절대 공짜가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갑신정변이 실제로 성공했더라도, 이들은 일본의 강해진 입김을 쉽사리 해결하지 못했을 듯합니다.

 

군사적으로는 당연히 계속 일본을 의지했을 것이고, 개혁도 일본의 차관을 도입해 추진했을 텐데 경제적으로도 예속당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입니다. 

 

결국 갑신정변의 주인공들은 이상에만 불타올라 현실적으로 혁명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하지 못한 탓에 정변을 일으키고 3일 만에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된 것 같습니다. 

 

 

4. 하고 싶은 이야기

 

간혹 갑신정변이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은 당시 서구문물을 흡수한 엘리트 계층들이었고, 혁명 당시 내세운 14개 조 개혁방안은 모두 선진적인 개혁안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저는 갑신정변이 성공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력이 약했으니,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휘둘리다가 결국 일본에게 식민지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갑신정변이 성공했어도 그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갑신정변 자체가 일본의 군사력에 기대어 시도했으니, 성공했어도 여전히 일본의 군사력에 의존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개혁세력이 내세운 경제정책도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와 진행하려고 계획을 했으니, 성공했으면 일본에게 군사력과 경제력의 장악을 내어 준 꼴이 될 것입니다. 

 

더구나, 저는 그들의 국정운영능력이 검증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국왕만 차지하면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백성들과의 소통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혁명이 롱런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대중의 지지도 받지 못하고, 자신들을 지킬 방어력도 없이 남의 손을 빌려 혁명을 시도하려고 했던 엘리트 집단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보고 들은 것은 많았으니, 얼마나 당시의 조선이 후진적인지 피부로 느꼈을 것입니다. 참지 못하고 어떻게든 나라를 바꾸어 보자고 혁명을 기획한 것은 좋았는데, 좀 더 똑똑한 머리로 전략적이고 장기적으로 준비를 했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면서도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은, 우리나라는 나라가 위험하거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들면 어떤 집단이든지 그 위기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집단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독립운동이든, 개혁이든, 쿠데타든 여하튼 마음에 들지 않는 국왕이나 당시 권력을 잡고 있는 조직을 뒤집어보려는 시도가 조선시대 내내 계속되었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그러한 시도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아서 역사적 사실을 훑어보면서 신기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정말 이런 혁명에 대한 근성이 종족적인 특성인 것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정리하며, 

 

역사를 복기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예상외로 많은 상상을 하게 됩니다. 물론 현실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상상은 쓸데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유사한 정치적, 국제적 상황이 현실에서도 간혹 벌어지기 때문에, 앞으로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 쓸데없는 상상은 아닙니다. 

 

조선말 상황을 보다 보면 우리나라는 주변에 강대국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렇게 주변국에 휘둘리던 조선이 세계 10대 강국으로 성장해서 제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고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성장이 아닌가 합니다. 

 

언제나 위기를 극복해 온 역사적 사실이 정말 우리 국민의 DNA에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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