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에 대하여 : 역사적 의미와 결과

역사와 고전

임오군란에 대하여 : 역사적 의미와 결과

월리만세 2021. 7. 3.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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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 

 

임오군란은 임오년에 발생한 군란입니다. 군란이란 군인들이 벌인 민란이란 뜻입니다. 

 

임오군란은 조선 말기에 발생한 사건인데, 당시에 왜 군인들이 봉기를 했을까요? 임오군란은 조선 말기에 진행되었던 개혁과정 중에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학교에서 국사시험을 치를 때 갑신정변, 임오군란, 갑오경장 등의 구한말 사건들을 시대순으로 나열하고 관련 없는 사실을 선택하도록 하는 문제를 많이 풀었습니다만, 임오군란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조선말기 개혁의 단초가 되었던 임오군란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최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복습하고 있는데, 고종실록에 임오군란이 나오길래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임오군란 발생 배경

 

임오군란은 흥선대원군이 민비의 세력에 밀려 실각한 이후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당시에 군인들이 급료를 받지 못해 항의를 하다가 곤장을 맞고 유배되는 일들이 종종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군인들이 급료를 못 받는 경우가 생겼을까요?

 

그것은 새로 집권한 민비의 세력이 국가의 재정을 너무 빨리 소진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민비는 원자의 탄생과 함께 복을 비는 굿과 제사에 돈을 많이 썼고, 잦은 잔치와 놀이문화, 심복들에 대한 하사품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민비는 처음 낳은 원자가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고, 뒤이어 낳은 공주도 바로 잃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어난 원자도 몸이 허약했고, 다음 해 태어난 아들도 네 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민비가 원자를 위해 대규모 제사와 굿을 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거기에 민비의 인척들이 세도정치를 시작하면서 벼슬에 대한 매관매직이 성행하면서 돈을 주고 벼슬을 산 지방관료들이 본인 몫을 챙기느라 조정에 상납이 줄어들면서 조신들의 녹봉뿐 아니라 군인들의 급료까지 체불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당시 군인 관리 체계는 5 군영으로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총윤청, 수어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5 군영에서 2개 영으로 개편이 되었는데, 그것이 무위영과 장어영입니다.

 

군사조직이 5개 영에서 2개 영으로 축소 개편되면서 개편 조직에 포함되지 못한 군인들이 소속을 잃고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급료도 무려 13개월이나 밀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개편 조직이었던 무위영과 장어영 군인들은 급료를 제때 받고 있었고, 별도로 신설되어 일본 교관에게 훈련받던 신식 군대들은 대우를 잘 받고 있었으니 비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2. 임오군란과 흥선대원군

 

고종 19년 임오년(1882년)에 13개월이나 밀렸던 급료가 드디어 1개월치가 지급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급료로 받은 곡식에서 모래와 겨가 섞여있었고, 그 수량도 적게 지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썩은 것도 이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군인들이 창고지기를 구타한 사건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고종에게 보고되었고, 고종은 지금까지 그런 홀대를 받으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군인들을 가상하게 여겨 잘 타이르도록 명령했는데, 민씨 세력이었던 당시 선혜청 제조 대감 민권호는 주동자 4명을 구속해버렸습니다. 

 

소문은 더욱 흉흉해져서 곧 이들이 사형당할 것이라고 전해지자 급기야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포도청과 의금부로 달려가 감옥을 부수고 동료를 구출한 것이 임오군란의 시작이었습니다.

 

쌓였던 분노가 폭발한 군인 무리는 흥분하여 일본 공관을 습격해 일본인을 죽이고, 억눌렸던 백성들도 동참해 그 규모가 커졌습니다. 민씨세력의 대궐을 불태우고, 선혜청 제조 대감 민겸호와 경기 감사 김보현도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딱히 특정한 개혁세력도 없이 일으킨 군사 민란이다 보니 군인들은 갑자기 폭동의 뒷일이 걱정되었을 것입니다. 언젠가 폭동은 진압될 것이고, 그 죄의 대가로 모두 처벌받을 것이 뻔했으니까요. 

 

이때 실각했던 흥선대원군이 부활합니다. 폭동을 일으킨 군인들은 흥선대원군을 뒤에 세우면 본인들의 목숨이 무사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합니다.

 

성난 군인들이 궁궐까지 쳐들어와 민비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때 등장한 흥선대원군은 성난 군인을 달래어 돌아가도록 만듭니다. 군인들이 민비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니, 흥선대원군은 민비가 세상을 떠났다고 선포함으로써 군인들을 안심시키고 폭동을 마무리했던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이 민비가 세상을 떠났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시신 없는 민비의 복식만 갖춘 채 장례를 치렀다고 하니, 도망친 민비가 다시 돌아올 구실을 없애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임오군란은 이렇게 마무리되었으나 그 결과로 정말 다양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3. 임오군란의 결과

 

먼저 화려하게 부활한 흥선대원군은 복귀한 지 한 달 만에 청나라에 납치를 당해 다시 권력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우습게도 청나라 군대의 호위를 받고 민비가 복귀하게 됩니다. 

 

오히려 청나라에 우호적이었던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게 납치당하고,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민비가 청나라의 지원하에 다시 권력을 잡게 되다니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청나라는, 당시 권력의 핵심이었던 흥선대원군을 납치함으로써 조선 내에 발언권이 확대되었고, 청나라에 네거티브했던 민비도 포섭하게 되어 결론적으로 조선에 대한 지배력이 확대되었습니다. 

 

일본은, 임오군란으로 인해 공관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자국민 보호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합니다. 그리고, 주도권을 청에게 내주면서 본인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냈는데, 바로 '제물포조약'이라고 불리는 '조일수교 조규'입니다.

 

제물포조약 내용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수 있게 되었고, 배상금 50만 원을 받아냈으며, 조선 전역을 마음대로 살펴볼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① 20일 이내 흉도를 잡아 처벌하고 일본과 공동조사를 한다. 

② 죽은 일본인에게 후한 장사를 치러준다.

③ 조선이 5만 원을 내 유족과 부상자를 지원한다.

④ 일본이 입은 손해에 대한 50만 원을 보상한다. 

⑤ 공사관에 군대를 두어 경비를 하도록 한다.

⑥ 조선의 대관이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가서 사과한다.

 

추가로 속약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부산, 원산, 인천의 통행거리를 사방 50리로 확대하고 2년 뒤에 100리로 확대한다는 내용과 일본의 공사, 영사 및 그 수행원과 가족은 조선의 모든 지역에 대해 유람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어쩌면, 주도권을 청나라에 양보하면서 실리는 모두 챙긴 것은 일본인 것 같습니다. 

 

 

 

4. 하고 싶은 이야기

 

임오군란의 결과 중에서 가장 미스터리 했던 것이 바로 흥선대원군의 결말입니다. 영화처럼 극적으로 권력을 회복한 흥선대원군이 본인이 믿고 의지했던 청나라에게 납치되어 실각하게 된 것입니다. 

 

왜 청나라는 흥선대원군이 아니라 민비를 선택했을까요? 

 

그것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정책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입니다. 당시 조선 정책을 관장했던 리홍장이 취했던 대조선 전략은 '이이제이'였습니다.

 

바로 오랑캐를 이용해 오랑캐를 막는다는 것인데, 청나라가 막고 싶었던 오랑캐는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조선이 일본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이겠죠. 

 

그래서, 청나라는 조선에 미국과 독일과 프랑스를 소개해 주면서 개화 조약을 맺도록 종용합니다. 바로 이 서구 열강들을 활용해 일본이 조선에서 세력을 넓히는 것을 방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다시 잡게 되면 쇄국정책 등으로 서구세력과 마찰이 생기고, 더불어 일본에 적대적으로 대해 오히려 일본이 조선을 적극적으로 침략할 빌미를 마련해 줄 수 있다는 걱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홍장은 흥선대원군을 내리고 민비를 내세웠던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정치판도 다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본인 국가의 정책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면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것이 국제정세니까요.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 글로벌 무대인 것 같습니다. 

 

힘이 약한 국가였으니 정말 불쌍하게도 마음대로 주변국에 휘둘렸던 것이죠. 조선 말기 역사를 보면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이렇게 중국의 지배력이 강화되어 중국은 대놓고 조선을 속국 취급하게 되고, 조정에 간섭을 심하게 하게 됩니다. 중국의 입김이 거세지고 사대주의 사상이 싹트게 되자 오히려 여기에 대한 반발세력이 자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갑신정변이 발생하게 된 단초였습니다. 결국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은 서로 연결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갑신정변의 원인이 된 사건이었으니까요.  

 

 


 

정리하며, 

 

임오군란은 여로모로 의미가 많습니다.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극적으로 부활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의해 무너지고, 청나라에 부정적이었던 민비가 재등장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국제정세와 정치적인 논리로 간혹 상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생기기도 하는데 바로 그런 일들은 예전부터 있었다고 생각하니 역사는 말 그대로 계속 반복되는 것 같았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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